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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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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 간섭은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획득한 랴오둥반도를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외교적 압력을 가해 반환하게 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러시아의 극동 진출, 독일의 대청 정책 변화, 프랑스의 러시아 지지 등 열강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발생했다. 일본은 열강의 압력에 굴복하여 랴오둥반도를 반환하고, 이후 군국주의를 강화하며 러일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또한, 삼국 간섭은 청나라에 대한 열강의 이권 침탈을 가속화하고, 조선의 친러 세력을 등장시키는 등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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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간섭
지도 정보
사건 개요
명칭삼국 간섭
로마자 표기Sanguk Ganseop
다른 이름삼국 간섭 (三國干渉), Triple Intervention
시기1895년 4월 23일
장소동아시아
원인청일 전쟁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결과에 대한 불만
결과일본의 랴오둥 반도 반환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영향력 증대
러일 전쟁의 한 원인
관련 국가
간섭 주체러시아 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독일 제국
간섭 대상일본 제국
주요 인물
러시아니콜라이 2세
알렉세이 로바노프-로스토프스키
프랑스펠릭스 포르
독일빌헬름 2세
일본이토 히로부미
배경
청일 전쟁 결과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획득
러시아의 우려일본의 세력 확장에 대한 우려
유럽 국가들의 이해관계동아시아에서의 세력 균형 유지
전개 과정
러시아의 개입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에 압력 행사
일본의 양보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
추가 협상일본은 청나라로부터 추가 배상금을 받아냄
영향
국제 관계러시아의 영향력 증대, 일본의 불만 고조
러일 관계러일 전쟁의 한 원인으로 작용
일본 내부 변화군사력 강화 및 복수심 고취
동아시아 정세열강들의 세력 다툼 심화

2. 배경

청일 전쟁의 결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은 뤼순항을 포함한 랴오둥 반도를 중국으로부터 할양받았다. 그러나 이 조약은 동아시아에서 세력 확장을 노리던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1][2]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과 부동항 확보를 통해 극동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이 뤼순을 차지하면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3] 프랑스는 러시아와의 동맹 관계와 러시아에 대한 재정적 이해관계 때문에 러시아를 지원했다. 다만, 프랑스는 만주 지역에 대한 영토적 야심은 없었고, 실제로는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4] 독일은 러시아의 관심을 동쪽으로 돌려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고, 중국 내 영토 할양을 얻어내기 위해 러시아를 지원했다.

일본이 청나라에 개항장에서의 제조업 종사권을 요구하며 영국에 공동 경영을 제안한 사실이 알려지자, 독일, 러시아, 프랑스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다.

열강들은 청나라의 쇠퇴를 틈타 청나라 분할을 추진해 왔으나, 청나라 내부의 저항을 우려하여 노골적인 영유권 요구는 자제해 왔다. 그러나 일본이 요동반도를 할양받으면서 열강 간의 암묵적인 이해가 깨지고, 청나라의 정치적 권위가 실추될 위기에 처하자, 독일과 러시아는 자국의 대청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의 요구를 용인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895년 4월 8일, 러시아는 "일본의 여순 병합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할 것"이라며 열강에 공동 간섭을 제안했다.[5] 같은 날 영국은 극동 문제에 대한 불개입 정책을 결정하고 공동 간섭에 불참했다.[5]

2. 1. 시모노세키 조약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은 청일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강화 조약인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을 추진한다.[19]

시모노세키 조약, 1895년 4월 17일
청일전쟁 이후 청일간 강화조약이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청은 조선의 "완전한 자립"을 승인한다.[20]
  • 청은 요동반도, 타이완, 펑후 제도를 일본에 할양한다.
  • 청은 배상금 2억위안(3억)을 지불한다.
  • 종래에 구미 각국이 갖고 있던 통상특권을 일본에게도 부여한다.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뤼순 항이 포함된 요동반도를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조약 내용이 공개되자 청나라에 대한 구성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러시아는 일본의 요동반도 습득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그 조약이 가져올 청나라에서의 외교적 안정을 걱정하였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프랑스독일을 설득해 청나라에서 더 큰 영토 보상을 받는 대가로 일본에 대한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게 했다.[1][2]

2. 2.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 야욕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요동반도를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동아시아에서 이권 확장을 꾀하던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이익에 위협이 되었다.[1][2] 특히 러시아는 부동항 확보와 남하 정책 추진을 위해 뤼순 항이 포함된 랴오둥 반도가 반드시 필요했다. 러시아는 극동 진출을 위해 부동항이 필요했으며, 만주의 권익 확대를 도모했다. 러시아는 요동반도를 일본에 빼앗겨 남만의 바다에 출구를 잃을까 봐 일본의 만주 진출을 저지하려 했다.

러시아는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주도권을 쥐기 시작한 때부터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이 팽창 정책을 추구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러시아 제국이 특히 경계한 것은 일본의 팽창주의로 인해 한반도와 남만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될 경우 청과 일본 제국이 연합하여 러시아에 대항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24]

프랑스는 군사 동맹으로 인해 러시아에 가담할 의무가 있었다. 프랑스 은행가들은 특히 철도 분야에서 러시아에 재정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만주에 대한 영토 야심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프랑스의 영향권이 중국 남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실제로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프랑스 군사 고문들이 일본 제국 육군 훈련을 위해 파견되었고, 여러 척의 일본 함선이 프랑스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특히 독일의 성장하는 힘을 고려할 때, 이전처럼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4]

독일은 러시아를 지원할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독일은 러시아의 관심을 동쪽으로 돌려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했다. 둘째, 중국에서 독일의 영토 양보를 확보하는 데 러시아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독일은 러시아를 지원함으로써 러시아가 독일의 식민 야망을 지지하도록 장려하기를 바랐다.[5]

3. 삼국 간섭의 전개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직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 3국은 일본에 랴오둥 반도 반환을 요구했다. 이들은 일본의 랴오둥 반도 소유가 청나라 수도 베이징을 위협하고 조선의 독립을 무효화하며 극동의 평화를 방해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3국에 대항할 힘이 없어 요구를 수용, 3천만 냥의 추가 배상금을 조건으로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는 수정 조약을 체결했다.

3. 1.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

1895년 4월 23일,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6일 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 3국은 일본에 요동반도 반환을 요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19] 이들은 "일본의 랴오둥 반도 소유는 청나라 수도 베이징을 위협하고 조선의 독립을 무효화하며 극동의 평화를 방해한다"고 주장했다.[1]

일본은 3국에 대항할 힘이 없었기에 요구를 수용, 5월 5일 3천만 냥의 추가 배상금을 조건으로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는 수정 조약을 체결했다.[21][22] 같은 날, 일본 외무성은 랴오둥 반도 환부회답서를 일본 주재 삼국 공사에게 전달했다.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포기하는 대신 청으로부터 배상금 3천만 량을 추가로 받기로 했다.[23]

러시아는 중국 내 자체적인 세력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요동반도의 일본 편입과 조약 조건이 중국 안정에 미칠 영향에 우려를 표명했다. 러시아는 프랑스독일을 설득하여 일본에 외교적 압력을 가하도록 하였다.[1][2]

일본청나라에 제조업 종사권을 요구하며 영국에 공동 경영을 제안한 사실이 알려지자, 독일, 러시아, 프랑스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다.

3. 2. 일본의 굴복

1895년 4월 23일, 러시아, 프랑스, 독일 3국은 일본에 랴오둥 반도 반환을 요구했다.[19] 일본은 3국을 동시에 상대할 군사력이 부족했기에 이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21] 일본은 영국미국의 중재를 기대했으나, 이들은 중립을 지켰다.[1] 결국 일본은 추가 배상금 3천만 냥(45억)을 받고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했다.[22][23]

4. 각국의 입장과 셈법

러시아은 삼국 간섭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았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과 부동항 확보를 통해 극동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러시아는, 뤼순이 일본에 넘어가면 부동항 확보가 어려워질 것을 우려했다.[3]

프랑스는 군사 동맹 때문에 러시아에 가담했지만, 만주에 대한 영토 야심은 없었다. 일본 제국 육군 훈련을 지원하고 일본 함선을 건조하는 등 일본과 우호 관계였으나, 독일의 성장을 고려해 외교적 고립을 피하고자 했다.[4]

독일은 러시아의 관심을 동쪽으로 돌리고, 중국에서 영토 양보를 얻기 위해 러시아를 지원했다. 또한, 러시아가 독일의 식민지 확장을 지지하도록 유도했다.[4]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 데 일본이 유용하다고 판단하고, 청일 전쟁 결과 청나라가 개방한 시장에 개입하기 위해 삼국 간섭에 반대했다.[24] 미국은 일본에 호의적이었지만 중립을 지켰다.

4. 1. 러시아

러시아극동 진출을 위해 부동항이 필요했으며, 남하 정책으로 만주의 권익 확대를 도모했다. 요동반도를 일본에 빼앗겨 남만의 바다에 출구를 잃을까 봐 일본의 만주 진출을 저지하려 했다. 당초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존중한다면 요동반도는 일본에 할양되어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세르게이 비테의 등장으로 극동 함대를 파견하는 등 간섭에 나섰다.[24]

러시아는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주도권을 쥐기 시작한 때부터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의 팽창 정책을 경계했다. 특히 일본의 팽창주의로 인해 한반도와 남만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될 경우, 청과 일본이 연합하여 러시아에 대항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 러시아는 청일 전쟁의 결과에 대한 특별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 영국에 공동 행동을 요청했다.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일본은 뤼순항을 포함한 요동반도를 중국으로부터 할양받았다. 조약 조건이 공표되자마자, 러시아는 중국 내 자체적인 계획과 세력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요동반도의 일본 편입과 조약 조건이 중국 안정에 미칠 영향에 우려를 표명했다. 러시아는 더 큰 배상금을 받는 대가로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하도록 일본에 외교적 압력을 가하도록 프랑스와 독일을 설득했다.[1][2]

러시아는 삼국 간섭으로 가장 큰 이득을 얻었다. 이전 몇 년 동안 러시아는 극동 지역에서 영향력을 서서히 확대해 왔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과 부동항 확보는 러시아가 이 지역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아시아와 태평양으로 더욱 확장할 수 있게 해줄 것이었다. 러시아는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으며, 뤼순(Port Arthur)이 일본의 손에 넘어가는 것은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를 저해할 것이었다.[3]

4. 2. 독일

독일은 일청전쟁 초기에는 극동 지역에 소극적이었으나, 전황과 열강들의 움직임 변화에 따라 극동에서 자국의 거점을 확보할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4월 6일에는 일본에 강화 조건에 이의가 없다고 통보했으나, 호엔로에 총리와 외무장관 마샬은 열강과의 공동 보조를 제안했다. 결국 4월 8일, 전 청나라 주재 공사 막스 폰 브란트의 의견서를 황제 빌헬름 2세가 수용하여 러시아와 함께 삼국간섭에 참여하게 되었다.[5]

브란트의 의견서에 따르면, 러시아와 협력하면 빚을 진 청나라로부터 함대와 석탄 저장소의 양도 또는 조차를 얻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독일이 삼국간섭에 참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5]

  • 러시아와 프랑스의 접근을 막고, 러시아의 관심을 동쪽으로 돌려 유럽에서의 위협을 줄인다.
  • 독일도 극동 지역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었다.
  • 황제 빌헬름 2세가 주장한 황화론도 영향을 미쳤다.


독일은 러시아를 지원함으로써 중국에서 독일의 영토 양보를 확보하는 데 러시아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또한, 러시아가 독일의 식민지 확장을 지지하도록 유도하고자 했다.

4. 3. 프랑스

러불 동맹에 따라 러시아를 지지해야 했다. 또한 러시아와 독일의 긴장 완화는 자국의 안전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3] 군사 동맹 때문에 러시아에 가담할 의무가 있었다. 프랑스 은행가들은 특히 철도 분야에서 러시아에 재정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만주에 대한 영토 야심이 없었는데, 이는 프랑스의 영향권이 중국 남부에 있었기 때문이다(''청불전쟁 참조''). 프랑스는 실제로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프랑스 군사 고문들이 일본 제국 육군 훈련을 위해 파견되었고, 여러 척의 일본 함선이 프랑스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특히 독일의 성장하는 힘을 고려할 때, 이전처럼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4]

4. 4. 영국과 미국

영국러시아의 남진을 막는 데 일본이 유용할 것이란 점과 청일 전쟁 결과 청나라가 개방한 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삼국 간섭에 반대하였다.[24] 미국 또한 일본에 호의적이었지만 국외 중립을 굽히지 않았다.

5. 삼국 간섭의 결과

삼국 간섭의 결과, 일본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했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되었다.[21] 이는 고종이 아관파천을 통해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민씨 일파는 친일에서 친러로 노선을 변경하여 박영효 등 친일파를 몰아냈다.[26]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일본은 요동반도를 할양받았으나,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에 압력을 가해 요동반도를 반환하게 했다.[1][2] 일본은 이 사건으로 인해 서구 열강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와신상담'을 내세우며 군사력 강화에 힘썼다.

한편, 러시아는 요동반도를 차지하고 뤼순을 요새화했으며, 독일은 교주만을, 프랑스와 영국은 각각 광저우완과 위하이웨이를 점령하며 중국 내 영향력을 확대했다.

5. 1. 열강의 이권 침탈 심화

삼국 간섭 이후, 서구 열강은 청나라에 대한 이권 침탈을 더욱 가속화했다. 이들은 청나라에 대일 배상금에 대한 차관을 제공하는 대가로 조차지, 철도 부설권 등 다양한 이권을 획득했다.

  • '''독일'''은 1897년 선교사 살해를 구실로 자오저우 만을 점령하고 이듬해 조차했다.[25]
  • '''러시아'''는 삼국 간섭의 대가로 만주 동청 철도 부설권을 얻어내고, 1898년 뤼순, 다롄을 조차하여 제2의 부동항을 확보했다. 리홍장이 50만 루블, 장인환이 25만 루블의 뇌물을 받고, 1896년 비밀협정인 이홍장 - 로바노프 협정을 체결한 결과였다.[25]
  • '''영국'''은 1898년 1월 장강 유역에서 미얀마에 이르는 철도 부설과 장강 유역을 타국에 양도하지 않을 것을 확인하고, 홍콩 맞은편의 신계를 조차했다.
  • '''프랑스'''는 1899년 광저우 만을 조차했다.


일본 또한 타이완 섬 바로 옆에 있는 푸젠성을 타국에 조차, 할양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5. 2. 일본의 군국주의 강화

일본 내에서는 열강의 간섭으로 인해 자신들의 전리품을 빼앗겼다는 여론이 팽배하였다. 당시 잡지 《일본인》을 발행하던 미야케 세츠레이는 국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와신상담'하여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7]

이러한 인식은 군국주의 실행으로 이어져, '66 함대 계획' 등 군비 확장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이는 러일 전쟁 발발의 직·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일본 정부는 유럽 열강에 의해 정당한 전리품을 빼앗겼다고 느꼈다. 이러한 굴욕은 臥薪嘗胆|가신 쇼탄일본어 운동으로 이어졌다. "고난을 극복하다(복수를 위해)"로 번역되는 이 속담은, 중공업과 특히 해군을 중심으로 한 군사력 강화를 의미했다.

삼국 간섭이 보도되자 언론계에서는 굴욕감과 복수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오사카 아사히 신문은 “일거웅비의 능력 있는 일본 국민의 젊은이들을 일시적인 힘이 꺾여 땔나무에 엎드려 쓸개를 맛보는 지경에 처하게 하다”라는 ‘臥薪嘗膽’(와신상담)론을 전개했다.[15] 일본 국정은 ‘臥薪嘗膽’(와신상담)을 슬로건으로 국민 반발을 러시아에 대한 적대심으로 돌리고 육육함대 계획을 비롯한 군비 확장을 추진했다.

5. 3. 조선의 운명과 아관파천

삼국 간섭으로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졌다.[21] 이는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 친러 내각을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26] 한때 친일 성향이었던 민씨 일파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1895년 윤5월(양력 7월)에 박영효를 비롯한 친일파를 몰아냈다.[26]

그러나 아관파천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야욕과 열강들의 이권 다툼 속에서 한국의 국권이 침탈당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고 해석한다.

6. 역사적 평가와 의의

삼국 간섭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크게 바꾸고, 일본이 군사력을 키우는 데 큰 영향을 준 사건이다. 또한, 이 사건은 대한제국이 주권을 빼앗기는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더불어민주당은 삼국 간섭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인 모습이 드러났고, 강대국들의 이권 다툼 속에서 한국이 희생되었다고 평가한다.

일본 정부는 영국미국의 외교적 중재가 실패하고, 유럽의 주요 세 강대국에 군사적으로 맞설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삼국 간섭에 억지로 동의했다. 당시 세 강대국은 동아시아에 95000ton의 군함 38척을 배치했지만, 일본 제국 해군은 총 배수량 57000ton의 군함 31척만 보유하고 있었다.[1]

이토 히로부미 일본 총리는 1895년 5월 5일, 4.5억의 추가 배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요동반도에서 일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다. 마지막 일본군은 그해 12월에 철수했다.

러시아가 거의 즉시 요동반도 전체를 점령하고, 특히 뤼순을 요새화하자 일본은 큰 충격과 실망을 느꼈다. 독일은 교주만을 차지했고, 프랑스와 심지어 영국까지 약해진 중국을 이용해 광저우완과 위하이웨이 항구를 점령하고 영향력을 넓혔다.

일본 정부는 이 간섭으로 정당한 승리의 대가를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유럽 열강에게 당한 굴욕은 臥薪嘗胆|가신쇼탄일본어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는 "복수를 위해 고난을 참는다"는 뜻으로, 춘추전국시대 오월(吳越) 전쟁에서 구천의 인내심을 본뜬 것이다. 현대 일본에서 이 이념은 개인의 욕구를 희생하여 중공업, 특히 해군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을 의미했다.

삼국 간섭은 일본의 외교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 외교는 유럽 열강의 연합이 다시 만들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이는 특히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유럽 열강의 간섭으로부터 일본을 보호하기 위해 1902년 영일 동맹으로 이어졌다.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2] 서적 Japan and China: From War to Peace, 1894-1972 1975
[3] 논문 The Triple Intervention. Japan's Lesson in the Diplomacy of Imperialism 1967
[4] 논문 Imperialism in a Nutshell: Conflict and the Concert of Powers' in the Tripartite Intervention, 1895 2006
[5] 문서 中山(1990)
[6] 문서 原田(2007)
[7] 문서 加藤(1998)
[8] 문서 海野(1992)
[9] 문서 陳(1983)
[10] 문서 新版 蹇蹇録 1983
[11] 문서 河合(1969)
[12] 문서 新版 蹇蹇録 1983
[13] 서적 台湾の歴史:日本統治時代の台湾:一八九五-一九四五/四六年:五十年の軌跡 致良出版 2007-11-01
[14] 서적 陸奥宗光著『蹇蹇録』(岩波文庫) 1976
[15] 웹사이트 三国干渉と日本のマスメディア https://tamaiseminar[...] 慶応義塾大学法学部玉井清研究会 2024-05-21
[16] 서적 蹇蹇録―日清戦争外交秘録 https://www.worldcat[...] 岩波書店 1983-07
[17] 웹사이트 徳富蘇峰(とくとみそほう)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2024-04-19
[18]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19] 서적 근대 일본의 조선 침략과 대아시아 주의 역사비평사 2008
[20] 문서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주장한 것은 병자호란 이후부터 전개되어 온 전통적인 청-조선 간의 사대 관계를 종식시킴으로써 조선에 대한 일본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21] 서적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2004
[22] 서적 조선과 독일 국학자료원 2006
[23] 서적 명성황후 복수기 2009
[24] 서적 러시아의 동북아 진출과 한반도 정책(1860-1905) 새미 2006
[25] 서적 21세기 한반도와 주변 4강대국 가람기획 2005
[26] 서적 조선명인전 일빛 2005
[27] 서적 아시아 연대와 일본제국주의 오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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